더하기휴

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휴입니다.

2016년 9월 6일 화요일

전교조 선생님들과 함께 다녀온 백두산 북중접경지역 평화감성여행.
 
723일부터 27일까지 전교조 경기지부, 경남지부, 전남지부 선생님 37명과 함께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북중접경지역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조선이 식민지로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전쟁인 러일전쟁의 격전지 203고지를 시작으로 저항시인 윤동주의 생가까지. 한반도 땅에서 잠시 벗어나 동아시아의 눈으로 다시 한반도를 바라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첫날 점심, 1시간 남짓 비행을 하고 대련 공항에 내렸습니다.
 
첫번째로 러일전쟁의 격전지 203고지를 갔습니다. 당시 제국인 러시아와 일본이 싸운 전쟁, 일본에게 승리를 안겨준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203고지였습니다. 일본에게는 승리의 전쟁이었지만, 조선에게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느데 이제 아무런 걸림돌이 없게되는 국제적 조건을 만드는 그러한 전쟁이었죠.
 
비극의 시작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안중근 의사가 계셨던 뤼순감옥으로 갔습니다.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등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뤼순감옥. 커다란 감옥 속에서 목숨이 다 할때까지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수많은 선열들을 가슴이 새기였습니다.
 
그리고 관동법원에서 우리민족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며 만주에서의 일제의 만행을 들을 수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던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항일의 의지를 다시금 볼 수 있었습니다.
 







둘째날 일정을 하기 위해 5시간 여를 버스로 달려 단둥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일정을 시작하여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 그 전부터 너무나 많은 비가 내려 안타깝게도 압록강 유라섬을 탈 수 없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ㅜㅜ 실제 가보니 압록강 수위가 너무 높아 실제 배를 타기 어려운 지경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가 몇 일전 압록강 물이 범람한 사진을 보여주니 그나마 압록강 철교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먼저, 압록강 단교를 관람하였습니다. 이곳은 한국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다리의 일부가 아예 파괴되어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고 있었고,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간 날은 중국 국가건설 기념주간이라 그런지, 대형화면을 설치해놓고 전쟁 당시 영상을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해설을 통해 북중관계의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의 현장인 박작성, 중국에서는 호산장성이라 부르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호산장성은 우리나라 고구려의 성터인 박작성 터인데, 중국정부에서 이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며 아예 새로 건축한 관광지로 되어있었습니다.
우선 바로 옆에 있는 일보과라는 곳에서 한치앞만 건너도 바로 북녘땅이 보이는 곳에서 분단의 현실을 잠깐 느껴보고, 호산장성에 올라 중국 동북공정의 현재를 보았습니다.
나라가 분단되어 힘이 약하다보니 이런 역사왜곡 문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곳을 보고 나서 점심 식사 후 백두산까지 우리는 데려다줄 열차를 타기 위해 단둥기차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마도 여행의 가장 긴 이동이면서도 광활한 만주벌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18시간 열차를 타는 것은 또 하나의 여행의 특별코스일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기차 안에서 먹을 거리들을 사고 기차에 올라타 긴 시간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한잔하면서 또 끝없는 옥수수밭과 만주벌판을 보면서 이도백하역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셋째날 아침, 이도백하역에 도착해서 바로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에 비도 오고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막상 이도백하역에 도착하니 날씨가 점점 개이면서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산에 오를 차비를 한 다음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 ‘백두산노래를 배우며 민족의 성산으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가는 백두산 코스는 북파 코스였습니다. 셔틀 버스를 타고 또다시 중간에 봉고차를 갈아타고 천지 바로 밑에까지 가는 길, 산길을 직접 밟으며 올라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쉽게 가보지 못하는 백두산에 오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셔틀을 타고 봉고차를 타야하는데, 버스가 그곳을 지나쳐 장백폭포에 멈추었습니다. 천지에 사람이 너무 많아 내려주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선 먼저 백두산에 유일하게 있는 폭포인 장백폭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다시 버스에 탔습니다. 그리고 꼬불꼬불 봉고차의 손잡이를 붙잡고 아슬아슬 산길을 올랐습니다. 드디어 천지. 아주 맑진 않았지만 선명히 잘 보이는 백두산 천지를 보며 몇 번을 봐도 뭔가 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한참동안 천지를 구경하고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넷째날, 천지를 본 그 감격을 안고 마지막 날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3시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훈춘, 그러니까 중국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가장 끝지점인 방천에 있는 용호각이라는 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은 중국과 북, 러시아 삼국의 국경이 맞닿아있는 곳으로, 날씨가 좋으면 머나먼 동해바다도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안개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탓에 전망대에 오르기만 하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다음 코스인 도문으로 향했습니다.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한반도의 끝인 두만강에 도착해 두만강 뗏목을 타고 북한과 중국이 여전히도 물자를 교류하고 있는 도문대교를 조망하고 마지막 코스인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두만강에서의 시간이 분단과 통일의 현실을 가장 직감할 수 있고 통일에 대한 생각이 가장 많이 드는 곳일 것입니다.
 
마지막 용정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대성중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저항시인 윤동주의 삶이 담긴 영화 동주도 보았고, 시인의 갈등과 고뇌가 담긴 생가와 시를 보면서 주권을 잃은 나라의 청년의 삶이 어떤 처지였는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성중학교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그간의 여행의 회포도 풀도 어떤 느낌이었는가를 공유하는 뒤풀이 자리도 가졌습니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5일의 기행을 마치고 마지막날 연변 조선족(우리민족)의 항일운동역사, 전통 풍습 등이 전시되어있는 연길박물관 관람을 하고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넷째날 밤 소감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보니 많은 분들에게 이번 기행이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같아 준비했던 입장에서 참 뿌듯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기행을 통해 역사와 평화, 통일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6년 3월 2일 수요일

서승교수와 함께 동아시아 평화찾기 기행 2_[오키나와]편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작은 발걸음... 두 번째
평화를 빼앗긴 섬, 오키나와평화기행



 
겨레하나가 한겨레신문사 통일문화재단와 공동기획한 서승과 함께하는 동아시아평화찾기의 두번째 답사지는 일본 오키나와이다. 일본 후쿠시마원전사태 이후 일본 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동양의 하와이오키나와는 화려한 이면에 전쟁, 점령, 그리고 미국 군사기지로 평화를 박탈당해 왔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류큐국으로 고유한 국가체제를 가졌지만 명치유신 이후로 강제로 일본 병합되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주민 10만을 비롯한 약 20만여명의 희생자가 난 비극의 현장이었다. 전쟁 이후 미군정시기를 거쳐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었으나 주일미군기지의 80% 오키나와면적의 25%가 오키나와에 집중됨으로써 평화를 바라는 오키나와인들의 바램과 관계없이 미국의 동아시아군사정책의 요석으로 자리잡고 있다.
 
요즈음에는 미군 해병기지를 헤노코 연안에 설치하려는 미국, 일본정부에 맞서 오키나와주민들이 오키나와현내 미 해병대기지 설치반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어 있고 제주 해군기지건설 전개양상과 기지건설 반대운동들이 여러모로 닮아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미해병대 병력이나 미공군 전략무기들이 한반도로 전개되어 한반도 긴장과 밀접한 지역이기도 해서 오키나와 곳곳에 위치한 미군기지들이 예사롭지 않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서승교수님을 비롯한 31명의 참가자들이 상호인사를 주고받는 출발행사를 힘차게 진행하고 오키나와로 출발하는 평화기행단은 오키나와전투관련 답사지로 구해군지하참호부, 히메유리기념탑, 평화초석의 평화공원, 찌비찌리가마를 방문했다.


 
오키나와전투는 미군의 일본본토상륙작전을 지연시키기 위한 일명 사석死石작전으로 불리운다. 전투의 승패가 어느 정도 정해진 이후에도 일본군은 전원옥쇄작전 미명아래 민간인들을 광기어린 전쟁속으로 내몰았다. 어린 여학생들이 동원되어 희생된 것을 기리는 히메유리기념탑, 일본군에 의해 강요된 집단자결로 가족이 서로 죽이는 비극의 현장에서 총 희생자 20만명 중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12만명에 달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키나와전투 당시 일본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자결했던 마부니언덕에 위치한 평화공원에는 태평양을 향해 평화의 염원이 펴져 나가는 것을 형상화한 평화의 초석이 건립되어 있으나 마부니언덕 곳곳에 위치한 일본 각 지역출신 일본군 위령비들은 보면서 전쟁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는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느낄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부터 일본군국주의 반대와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실천운동을 진행해 오셨던 서승교수님과 기행을 하면 많은 현지 평화활동가과 교류를 할 수가 있다.
 
이번 평화기행에서는 평화활동가이자 조각가인 긴죠미노루씨의 댁에서 오키나와평화운동의 노장인사들을 몇분 만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하게 연세가 좀 있으신 듯 하였으나 모두들 격정의 인사말씀과 정치연설, 그리고 오키나와전통악기 삼센연주 등으로 모두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한마당을 연출하였다.


 
이번 기행의 하이라이트인 이에지마(伊江島) 방문이 날씨가 허락지를 않아 취소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 뉴스를 보니 오키나와 역사상 가장 추운 날씨 아니 동아시아지역 자체가 기록적인 동장군이 찾아왔었다. 미군 폭격기 연습장으로 잘 알려진 이에지마(伊江島)는 한국전쟁 당시 핵폭탄 투여훈련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오키나와가 한반도 전쟁시 연관성이 매우 높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에지마(伊江島) 답사의 아쉬운 취소를 뒤로 하고 요즈음 뜨거운 이슈인 헤노코기지건설 반대농성단을 방문 했다.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오키나와 현()지사는 작년 12‘ALL 오키나와란 기치로 후텐마기지의 현외(縣外)이전을 내걸고 당선되어 헤노코연안에 해병대기지를 건설하려는 아베정부와 미국을 곤경을 빠뜨렸다. 우리 기행하는 기간에 마침 후텐마기지가 현대 위치하고 있는 기노완(宜野灣)시 시장선거가 벌어져 헤노코기지건설에 대한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진행되고 있었다.(이 후 선거에서는 헤노코연안으로 기지이전을 주장하는 자민당후보가 당선되었다.)
우리 기행단은 제주 강정해군기지건설과 같은 문제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오키나와주민들을 위해 기행단 일행인 만화가 고경일 상명대교수님께서 휼륭한 삽화플랑을 즉석에세 제작해 연대투쟁을 표현했다.


 
마지막날 오전에 옛 류큐왕국의 왕성인 수리성을 답사를 마친 기행단은 34일 일정을 마무리했다. 기행참가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쟁, 점령, 그리고 미군기지 등으로 평화를 빼앗긴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재가 너무도 가슴들이 아팠지만 "승리한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고 있는 것이다." 헤노코기지건설 반대투장에 참가하시는 90대 할머니의 말씀에서 길고 힘든 싸움이지만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있었다.


서승교수와 함께 동아시아 평화찾기 기행 1_[난징]편

겨레하나가 한겨레신문사 통일문화재단와 공동기획한 ‘서승과 함께하는 동아시아평화찾기’의 첫 답사지는 중국 남경(南京)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의 남경함락 과정에서 자행한 30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일컫어 ‘남경대학살’이라 우리는 부르고 중국은 남경에 ‘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을 세워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 ‘학살’이 아닌 ‘도살’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일본군이 저지른 행위는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아닌 사람이 가축을 ‘도살‘을 한듯한 광기였음을 말하고 있다.







기념관에서 우리는 ‘남경대학살’을 기념비, 조형물, 그리고 사진뿐만이 아닌 80세가 넘은 한 노파의 생생한 증언으로 전율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10세의 어린 소녀였던 楊선생님은 눈앞에서 할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짐승처럼 부려지다 죽어가는 그 날들을 눈앞의 현실인양 오열속에서 힘겹게 이방인들 앞에서 증언해주셨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힘들다’던 영화속의 남경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남경의 역사를 보면, 위,촉,오 삼국시대때 오(吳)나라의 초대 황제인 손권(孫權)이 곳에 건업(建業)이란 이름으로 도읍을 정한(AD 229년) 이래 북방유목민 중심의 북조에 대항한 한족중심의 남조는 이 곳을 수도로 삼았고 송(宋)나라, 명(明)나라 주원장은 경사(京師)란 이름으로 정식 수도를 삼은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고도(古都)이다. 그리고 중국근대사에서 남경은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을 세운 이래 국민당정부의 수도로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내 도로변에 서있는 크고 특이한 가로수가 인상적인 이 유규한 도시에는 역사유적지가 곳곳에 산개해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명나라 때 건설한 북경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남경성벽은 남경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삼일만에 돌파해 시내곳곳을 살인, 약탈한 역사적 아픔이 성벽돌 하나하나에 묻어있는 듯하고 중국근대혁명을 이끈 손문이 묻힌 거대한 중산릉(中山陵)은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깊숙히 감내하는 듯 하다. 

12월28일 망국적인 위안부관련 한일합의에 대한 소식을 접한 우리의 마지막 날인 12월29일 일정은 이제항利濟港) 위안소 기념관이었다. 남경 총통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곳은 위안부들이 지목한 아시아 현존 최대 규모의 일본군 위안소 옛터이다. 위안소로 활용된 건물 면적은 4,800평방미터이고 외부의 가게까지 합하면 8,000요평방미터로 규모가 매우 컷음을 알 수 있다.







중국정부와 남경시는 치욕의 현장이자 일본의 야만적인 현장을 공개함으로써 치욕의 역사에 대해 용서는 할수 있으나 절대 잊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국가적인 대책이나 지원활동은 전혀 하지 않다가 굴욕적인 한일합의함으로써 국가적인 치욕을 자초한 박근혜정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제항 기념관에서 일제가 자국의 군사력이 미치는 모든 범위에서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징발하고 국제적인 전선에 걸쳐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였음 보여주고 있고 한국과 함께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희생된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를 막지 못한 자국의 역사를 자존심의 큰 상처로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기념관에서 새기고 있었다. 

이번 남경기행에서는 남경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로 대표되는 광기어린 전쟁의 역사 현장속에서 비극과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서로가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미일군사동맹으로 부활하는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경각심과 결의를 세울 수 있는 기행이었다.

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여행사업단 더하기휴입니다.
더하기휴는 역사와 평화, 통일을 주제로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합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격동하는 동아시아 정세. 동아시아의 중심에 서있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우리의 미래를 희망차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사람들이 살아왔던 역사 속에 현재의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더하기휴가 만드는 새로운 여행. 이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