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휴입니다.

2016년 3월 2일 수요일

서승교수와 함께 동아시아 평화찾기 기행 1_[난징]편

댓글 없음
겨레하나가 한겨레신문사 통일문화재단와 공동기획한 ‘서승과 함께하는 동아시아평화찾기’의 첫 답사지는 중국 남경(南京)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의 남경함락 과정에서 자행한 30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일컫어 ‘남경대학살’이라 우리는 부르고 중국은 남경에 ‘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을 세워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 ‘학살’이 아닌 ‘도살’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일본군이 저지른 행위는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아닌 사람이 가축을 ‘도살‘을 한듯한 광기였음을 말하고 있다.







기념관에서 우리는 ‘남경대학살’을 기념비, 조형물, 그리고 사진뿐만이 아닌 80세가 넘은 한 노파의 생생한 증언으로 전율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10세의 어린 소녀였던 楊선생님은 눈앞에서 할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짐승처럼 부려지다 죽어가는 그 날들을 눈앞의 현실인양 오열속에서 힘겹게 이방인들 앞에서 증언해주셨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힘들다’던 영화속의 남경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남경의 역사를 보면, 위,촉,오 삼국시대때 오(吳)나라의 초대 황제인 손권(孫權)이 곳에 건업(建業)이란 이름으로 도읍을 정한(AD 229년) 이래 북방유목민 중심의 북조에 대항한 한족중심의 남조는 이 곳을 수도로 삼았고 송(宋)나라, 명(明)나라 주원장은 경사(京師)란 이름으로 정식 수도를 삼은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고도(古都)이다. 그리고 중국근대사에서 남경은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을 세운 이래 국민당정부의 수도로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내 도로변에 서있는 크고 특이한 가로수가 인상적인 이 유규한 도시에는 역사유적지가 곳곳에 산개해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명나라 때 건설한 북경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남경성벽은 남경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삼일만에 돌파해 시내곳곳을 살인, 약탈한 역사적 아픔이 성벽돌 하나하나에 묻어있는 듯하고 중국근대혁명을 이끈 손문이 묻힌 거대한 중산릉(中山陵)은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깊숙히 감내하는 듯 하다. 

12월28일 망국적인 위안부관련 한일합의에 대한 소식을 접한 우리의 마지막 날인 12월29일 일정은 이제항利濟港) 위안소 기념관이었다. 남경 총통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곳은 위안부들이 지목한 아시아 현존 최대 규모의 일본군 위안소 옛터이다. 위안소로 활용된 건물 면적은 4,800평방미터이고 외부의 가게까지 합하면 8,000요평방미터로 규모가 매우 컷음을 알 수 있다.







중국정부와 남경시는 치욕의 현장이자 일본의 야만적인 현장을 공개함으로써 치욕의 역사에 대해 용서는 할수 있으나 절대 잊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국가적인 대책이나 지원활동은 전혀 하지 않다가 굴욕적인 한일합의함으로써 국가적인 치욕을 자초한 박근혜정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제항 기념관에서 일제가 자국의 군사력이 미치는 모든 범위에서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징발하고 국제적인 전선에 걸쳐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였음 보여주고 있고 한국과 함께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희생된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를 막지 못한 자국의 역사를 자존심의 큰 상처로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기념관에서 새기고 있었다. 

이번 남경기행에서는 남경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로 대표되는 광기어린 전쟁의 역사 현장속에서 비극과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서로가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미일군사동맹으로 부활하는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경각심과 결의를 세울 수 있는 기행이었다.

댓글 없음 :

댓글 쓰기